초등학생 시절 친구의 이름을 생각해 낼 수 없다. 잊어버려서는 안되는 업무 스케줄을 잊어버린다. 강물에 빠져서 익사할 뻔 했던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자신은 잘 기억하지 못한다. 우리는 이렇게 아주 흔하게 일어나는 일들을 '망각' 하고 있다.
평소 생활 속에서 건망증이 심한 편인지 아닌지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잊어버린 것이라기 보다 '기억해 낼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자기자신의 갓난아기 시절의 일들에 대한 기억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태어나서 말을 분명히 할 수 있게 될 정도 (대체로 3, 4세 정도) 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이 기간 중에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 (즉, 유아기의 에피소드 기억) 을 생각해 낼 수 없는 것을 유아기건망 이라고 부른다.
유아기건망이라고 하면 "그럴리 없다. 나는 내가 갓난아기일 때의 일을 잘 기억하고 있다"고 반론하는 사람도 많은 듯하다. 확실히 갓난아기 시절의 일을 기억하고 있다는 의견을 뿌리째 부정할 수 없으나 그와 같은 기억은 갓난아기 자신이 경험한 일들을 그대로 에피소드 기억으로서 남긴 것과는 다른 경우가 많다.
우리가 보거나 들은 것을 나중에 생각해 낼 수 있도록 하려면, 이를 위한 기명처리 (기억해 두기 위한 수단 - 말(언어) 등으로 머릿속에 정착 시키는 것) 를 해야만 한다.
굳이 의도하여 기명처리를 하지 않더라도, 일단 기억할 수는 있지만, 기명처리를 해두지 않으면 경험한 일이라 해도, 몇 년이 지난후부터 에피소드로 기억하는 것은 매우 어렵게 된다.
갓난아기 시절엔 누구나 말을 다 깨우치이 못하고 말을 알지 못한다. 기명방법도 모른다면 의미기억의 축적도 없다. 따라서, 갓난아기가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시간이 지나, 자신이 경험했던 일들의 에피소드'로 기억해 낸다는 것은 거의 없는 일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갓난아기 시절의 일을 기억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은 걸까?
이는 이후에 더해진 기억을 스스로 경험했던 기억이라고 생각해 버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체적으로 부모님을 비롯한 주변의 성인으로부터 종종 갓난아기 시절의 일들에 대해 들으면 자라난다.
보렴, 너는 이 코끼리 장난감을 무지 좋아하잖니 라든가 이걸 모르고 아빠가 밟아서 망가지니까, 엄청 울었다구, 그리고 사진을 보면서 이건 그 때 사진이란다. 그러니까 너는 울면서 사진을 찍은 거야. 라는 식으로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이야기를 들려 준다. 그러면 자신에게 그런 기억이 없더라도, 어느 샌가 그 사진의 광경과 에피소드가 자신 안에서 실제로 자신이 경험했던 일들처럼 생각되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갓난아기 때 에피소드 기억이, 자신의 기억으로 첨가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3, 4세 이전의 일들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에피소드 기억이라기보다 이후에 첨가된 기억일 가능성이 짙다고 말할 수 있다.
망각은 왜 일어나는가
1. 자연 붕괴설
시간이 흐를수록 기억이 희미해져 (자연스럽게 붕괴되어) 간다는 간단한 설.
에빙하우스라는 학자가 19세기 말엽에 제창한 것. 에빙하우스는 기억과 망각을 실험적으로 조사하기 위해 의미 없는 단어 (무의미한 철자의 묶음, 무의미음절) 를 손수 고안해 내었다.
일상에서 사용되는 단어 등을 기억의 실험에 사용하게 되면, 기억하기 쉬운 단어와 그렇지 않은 단어가 생기게 되어, 정확한 기억의 측정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의미한 음절로 이루어진 단어리스트를 사용하여, 자신이 실험대가 되어 기억과 망각에 대한 실험을 시행했고 그 결과가 L자형 망각곡선이다.
망각곡선은 단어 리스트를 완전히 기억하고 난 뒤, 몇 분 사이에 갑작스러운 망각이 일어나, 그 후에는 조금씩 잊혀저 가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우리가 오늘 아침 무엇을 먹었는지는 금방 기억해 낼 수 있더라도, 1개월 전의 그날 아침 무엇을 먹었는지는 좀처럼 기억하기 힘든 적이 있는 것은 이 붕괴설의 설명과 잘 들어 맞는다.
다만 자연 붕괴설만으로 우리 망각현상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고, 예를 들어, 거리에서 우연히 초등학교 시절의 옛 친구를 만났다고 가정하면 그 때까지는 생각나지도 않던 예전의 일이, 제법 상세한 것까지 기억나는 경우가 있다. 이런한 것은 시간이 흐를수록 잊어버린다는 자연 붕괴설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2. 간섭설
겨울 동안에는 늘 윗도리의 안쪽 주머니에 정기권을 넣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따뜻한 계절이 찾아오면 윗도리가 필요없게 되므로, 이번에는 정기권을 바지 뒷주머니에 넣고 다니기로 했다.
그러자 역 개찰구를 통과할 때, 그때까지의 습관대로 무심코 가슴 쪽으로 손을 가져가게 되는 상황이 발생한다. 혹은, 전직하고 새로운 회사에서 근무하게 되면, 그 회사의 전화번호를 기억할 때 즈음에는 이전 회사의 전화번호는 잊어버리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기억했던 것이, 다른 기억에 의해 방해를 받아 망각이 일어난다는 것이 간섭설이다. 간섭설에는 2가지가 있는데, 새로 기억한 것이 이전 기억에 의해 간섭받아 망각이 일어나는 '순향간섭'이 있고 앞의 정기권 이야기는 순향 간섭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전 기억했던 것이, 새로운 기억한 것에 의해 간섭받아 망각이 일어나는 것이 '역향간섭'이다. 전직한 뒤에 이전 회사의 전화번호를 잊어 버리는 것이 역향간섭의 한 예이다.
이와 같은 간섭은 기억했던 것들이 서로 닮아 있을 수록 일어나기 쉽다고 한다.
예를 들어, 희영이라는 이름의 여성과 교제하고 있는 남자가 있다고 하면, 한 동안 교제하고 희영씨와 결별한 후 이번엔 희정이라는 이름의 여성과 교제하게 되었다. 희정씨를 대하고는 그녀의 이름을 희영씨라 잘못 부르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 상당히 어색했다고 한다.
이름을 잘못 불러버렸던 것은 그의 희정씨에 대한 애정이 적어서가 아니라, 이름이 비슷했기 때문이며, 이에 더해 순향간섭이 강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3. 억압설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친구와의 약속을 어기려고 했던 건 아닌데도 그만 깜빡하고 잊어버렸다와 같은 경우는 일상에서 자주 일어나는 듯 하다. 이처럼 자신에게 왠지 싫은 것은 생각해 내고 싶지 않기 때문에 잊어버린다는 것이 억압설이다.
조금은 참을 수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잊어버리거나 하진 않는다. 그런데, 그 사람을 굉장히 싫어한다거나, 약속을 생각하면 불쾌해서 참을 수 없다거나 하는 등, 마음 속으로 생각하고 있을 경우에, 자기 마음의 안정을 지키기 위해 저절로 망각이 일어날 수 가 있는 것이다.
즉, 자신을 위협하는 듯한 일들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곳(무의식)으로 쫓아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무의식으로 쫓아낸다는 것이 억압이다. 이 설은 원래 정신분석으로 유명한 프로이트가 제창한 것이다.
1995년에 일어난 일본의 한신-아와지 대지진으로 집이나 가족을 잃은 사람, 특히 당시 어린아이였던 사람 중에는 지진이 났다는 것은 기억해도, 그 순간 어떠했는지 등을 금방 기억해낼 수 없던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스스로에게 너무나 괴로웠던 체험의 순간을 항상 생각하게 된다면, 누구라도 견뎌내기 힘들 것이다. 자아가 붕괴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어린이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억압에 의한 망각은 마음에 일어난 긴급사태에서 자아를 지키기 위해 발동해주는 메커니즘이라고 할 수 있다.
4. 검색실패설
알고 있는데 그 이름이 떠오르질 않는다와 같은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는 일일 것이다.
이것 봐! 오늘 저녁 뉴스 프로그램 사회자 말야, 이번에 그만 둔다는 회견을 했었다네..그리고...음..누구였더라..., 이처럼 그 사람과 관련된 정보는 제대로 기억해 내지만, 정작 중요한 그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은 목구멍에 걸린 현상을 설명해 주는 것이 검색 실패설이다.
기억해 내야만 하는 내용을, 장기기억으로부터 검색하여 작동기억으로 가져오는데 실패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설에서는 우리가 뭔가를 생각해 내는 것이 장기기억의 검색을 거쳐 그 정보를 끄집어 낸 뒤, 작동기억으로 가져오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목구멍에 걸렸다고 하는 현상의경우, 장기기억의 저장고로부터 기억이 사라졌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알고 있다는 확신은 있다. 그러나 검색이 원활히 이루어 지지 못하여 어라, 음...그러니까. 등의 머뭇거리는 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스스로 의식하여 자주 사용하는 지식이라면, 검색 실패는 그다지 일어나지 않는다. 보통 빈번히 사용하지 않는 지식은 정확히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장기기억의 깊숙한 곳에 묻여 활성화되지 않고, 검색의 그물에 걸리지 않는 것이다.
검색 실패에 따른 망각을 방지하려고 한다면, 평소에 자신이 갖고 있는 각 방면의 지식을 자주 활성화시켜 주는 것이 중요하다. 또 하나, 기억할 때 검색의 실마리를 많이 만들어 두면 검색이 수월해 진다.
가령 O O 씨에게 소개 받은 Z 씨, 탤런트 X X 와 닯은 Z 씨, 성악이라도 하는 듯한 아름다운 목소리의 소유지 Z 씨, 기업 어디에서 영업을 하고 있는 Z 씨와 같이, Z 씨라는 이름을 기억해낼 때의 실마리가 될 수 있는 에피소드적인 정보를 일부러 함께 기억해 두도록 하는 것이다.
기억하고 싶은 내용에 관련된 정보가 많을 수록, 기억에서 끄집어 낼 때의 실마리가 되기 쉽기 때문이다.
망각에 관한 4가지 설을 소개 하였는데 어느 것이 맞고 어느 것이 틀리다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설이 우리 일상에서 일어나는 망각이라는 현상의 다양한 측면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