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감이 제대로 기능하는 사람에게는 사물은 눈으로 보는 것이며, 소리는 귀로 듣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
분명, 빛이 전혀 없는 곳에서는 거의 사물을 볼 수가 없으며, 나이를 먹고 귀가 멀어지면 보청기나 집음기를 사용하여 조금이라도 소리를 잘 들으려고 한다.
이처럼 시각에는 빛, 청각에는 소리와 같이 감각의 종류 개개의 특성에 걸맞는 자극이 이미 정해져 있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적자극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어떠한 경우에나 사물은 눈, 소리는 귀라는 식으로 정해져 있는 것은아니다.
우리가 악기 연주를 들을 때에는 보통 귀로 듣는다. 그러나 귀 이외의 신체에서 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듣기보다 '느낀다' 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부풀어 오른 풍선을 가지고, 악기 앞에 세워보면 악기가 소리를 내면 손에 쥐고 있는 풍선이 덜덜 떨리는 진동을 느낄 수 있다. 놀랄지도 모르겠지만, 이 소리를 손으로 듣는다는 것이다.
이때 귀마개를 하고 최대한 소리를 작게 줄이면, 더 큰 진동의 형태로 소리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사실로부터 실제로 소리라는 것은 공기의 진동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악기에 따라 콘트라베이스와 플루트로는 풍선의 떨림도 다르게 느낄 수 있게 된다.
본래 청각으로 느껴야 할 소리라는 자극을, 피부라는 다른 감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 예라 하겠다.
손끝의 진동으로 문자를 읽는다?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문자를 읽는지에 관한 이야기이다. 보통 우리는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면 '점자'를 연상하게 된다. 예를 들어 맥주 같은 캔음료에도 점자가 표시되어 있으며, 샴푸나 린스의 용기에도 손끝을 대어 읽을 수 있게 한, 점자와는 다른 것이 새겨져 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은 이러한 정보를 손가락으로 읽는다.
그러나 외출을 하게 되면 우리의 신체 주변에는 점자로 되어 있지 않는 표시물이 아직도 많이 있다. 우편물도 그렇고 광고 전단지도 역시 그렇다.
점자와 달리, 눈이 잘 보이는 사람이 쓰거나 읽는 문자는 묵자라고 한다. 우편물이든 전단지이든 간에 묵자 그대로 점자로 찍혀 있지 않은 것을 명인이 읽어야만 할 때, 하나하나 해석을 부탁할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다.
묵자를 읽기 위한 다양한 특수 기기가 이전부터 개발되어 왔는데 어느 감각을 사용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다른 감각으로 대체하여 알 수 있게 하는 것을 '감각대행'이라고 부른다.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의 초능력?
종종 우리는 감각의 80%를 시각에 의존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우리가 그 대부분을 시각에 의존하고 있다는 말은 실제로 납득할 만한 사실이며 다양한 연구에서도 이를 입증하고 있다.
그러면 만약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을 때, 그것이 얼마나 불편한지는 쉽게 상상이 갈 것이다.
시험 삼아 자신의 방에서 눈을 가린 채 몸을 움직여 보자. 전기 스위치를 끄고 일어나, 양복을 넣어둔 장롱으로 다가가 내일 입을 옷을 준비해 보자.
보통은 의식하지 않는 채 자유자재로 하던 일인데도, 그렇지 못하게 될 것이다.
만약 거리였다면 어땠을까? 불안해서 한발주국도 내딛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 생각하면,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정말 이상할 정도로 매우 능숙하게 생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은 원래 어떤 감각이 무언가의 이유로 손상되면, 그 부분을 보완할 수 있게 다른 감각으로 커버할 수 있게 된다.
오감이 서로 맞물려 기능하는 인간의 신체에 있어서 다른 감각으로 커버하는 행위가 왠지 특별한 능력처럼 보이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