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어디까지 잔혹해질 수 있는가
자신은 옳지 않은 일 이라고 머리로는 알더라도, 할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다.
초. 중학교에 일어나는 집단따돌림 문제를 예로 들자면 어떤 아이가 자기는 동급생을 괴롭히는 이유가 딱히 없고, 괴롭히고 싶은 마음조차 없다고 가정해 보자.
하지만, 따돌림 행위에 참가하지 않으면 다음에 자신이 그 대상이 되거나, 그 패거리로부터 내쳐질 가능성이 생긴다.
이럴 때 대부분의 아이는 옳지 않다고 알고 있으면서도, 표면적으로는 따돌림에 가담하게 된다. 이것이 동조의 심리이다.
우리는 보통 굳이 다른 사람에게 미움을 받거나, 따돌림 당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보호해야만 하고, 자신의 본심은 숨긴 채 주위에 동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의 동조는 흔히 우리 주변에서 있는 일이다.
그 행위가 옳은지 그른지의 판단자체는 기본적으로 우리가 사회 속에서 자라온 과정에서 알게 모르게, 혹은 벌이나 강화를 통해 몸에 익혀온 것이다.
다만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더라도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부분이 우리들 인간의 약하고도 안타까운 점이다.
대리상태에서는 잔인해 질 수 있다
우리는 통상의 심리상태에서는 스스로 원해서 옳지 않은 잔혹한 행위를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존재이다.
그런데 상황에 따라서 자신도 모르게 터무니없는 잔혹한 행위에 다다를 때도 있다.
밀그램이라는 심리학자의 매우 유명하고 충격적인 '권위에의 복종' 이라는 실험을 소개하겠다.
실험 참가자는 '학습에 끼치는 벌의 효과에 대한 실험' 이라는 거짓 명목의 실험에 참가한다.
실험의 진짜 목적은 알려주지 않는다. 참가자는 이 실험에서 교사 역할을 한다.
주어진 과제는 일대일로, 교사 (역할자) 는 간단한 문제를 내고, 학생 (역할자) 은 그에 답하는 단순한 것이다.
단지, 학생이 답을 틀리면 교사는 벌로 전기충격을 준다.
또한 학생이 답을 틀릴 때마다 전기충역의 강도를 높여 나가야만 한다.
실은 학생 역할은 실험자 쪽의 지원자로, 일부러 답을 계속해서 틀린다.
그리고 실제로는 전기충격은 주어지지 않지만, 교사 역할자의 눈앞에서는 일부러 고통스러운 듯 몸부림친다.
실험이 진행되어 감에 따라, 교사 역할을 맡은 참가자는 실험이라고는 해도 이렇게 해도 되는지 갈등으로 괴로워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함께 하고 있는 실험자로부터 "계속해 주십시오" 라는 지시를 받으면, 실험자의 말 그대로 하게 된다.
도중에 실험을 그만둘 수 있는 선택권이 있는데도 말이다.
결국, 이 실험에 참가자 40명 전원이 300볼트까지 전기충력을 주며, 최고 전기 충격 (450 볼트 - 실제로 주었다면 사망에 이를 정도의 강도) 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했던 참가자는 40명중 27명에 달했다.
당시 참가자의 심리를 밀그램은 '대리상태' 라 불렀다.
요컨대, 이 실험처럼 폐쇄적인 상황에서 권위 있는 사람으로부터 명령을 받으면 이에 거역하지 못한채, '나의 의지로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저 명령에 따랐으므로 실험자의 대리로 하고 있을 뿐이다' 라고 생각하여 그대로 따랐던 것이라고 한다.
말 그대로 선악의 감각이 '마비' 되었던 상태 이다.
이 실험은 '아이히만 실험' 이라고 불린다.
이 실험은 제 2차 세계대전 때 독일에서 유태인 대량학살에 관련되었던 당시 게슈타포의 중간관리직에 있었던 아이히만이, 전후 재판에서 "나는 단지 상관의 명령대로 했을 뿐이다" 라고 일관된 진술을 했던 것에서 유래한다.
권위에 따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는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고 믿는 것으로, 인간은 끝없이 잔혹해 질 수 있다는 것을 실증했던 실험이라고 할 수 있다.